나는 5 딸 중 넷째로써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도와 드려야 했기 때문에 예외없이 어린 나를 포함해서 우리 자매는 모두 아들 몫까지 감당해야 했다. 우리 집은 쌀 장사를 했다. 잘 팔려면 일찍 안 나가면 안 되어서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가 엄마랑 같이 시장에 가곤 했다. 시장에 가면 장날이 끝날 때까지 엄마 옆에서 앉아 기다릴 뿐이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님에게 양이 많은 주문이 들어오면 멀리 있는데도 직접 가져다 드려야 했다. 엄마랑 아빠는 무거운 쌀자루를 수레에 실어 엄마는 앞자리에서, 나와 언니는 뒷자리에서 술레를 그렇게 밀고 가면서 쌀을 팔았던 기억들은 아직 생생하게 남아 있다. 다 하고 나서 엄마가 누구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닌 쌀국수 한 그릇을 사 주면 나는 더 기쁠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었는데. 녹두가 가공된 후 불량한 것을 고르는 일. 언니랑 같이 가서 했던 일인데 아직 어려서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기만 했지, 잘 못한다면서 며칠 만에 얼마 안 되는 돈을 받고 잘렸다. 중학교 때 사탕을 포장하는 일도 해 봤다. 지금 모두 기계로 만들지만 옛날에 다 손으로 만들어졌으니까. 해가 뜨나 비가 오나, 여름에도 겨울에도 상관없이 자전거를 타고 공장으로 갔다. 1킬로 700동(đồng, 한국 돈으로 약 37원)이었다. 계속 하다 보니까 냄새가 날 정도로 두 번째 손톱이 거의 다 뜯겨질지라도 빠진 날은 하루도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고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그렇게 살아 왔었다. 그런데도 내 손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어서 좋은 것이었다. 어려움을 극복해서 고등학교 때 나는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서 중학교 때 우리 반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내가 점점 인정을 받게 되었다.

대학교는 그동안 거두어 온 성과를 바탕으로 나는 항상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낮에 학교를 다니고 집에 돌아오면 선생님이 낸 숙제는 말할 것도 없고 내가 스스로 찾은 과제도 열심히 해싿. 어떤 일이든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는 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열심히 할수록 점수는 툭 떨어졌다. 그래서 장학금은커녕 나는 여전히 친구에게 인정을 못 받았던 것이다. 반대로 내가 공부에 신경을 잘 안 썼을 때는 왠지 나도 모르게 점수가 올랐지. 그 때부터 하나 깨닫게 되었는데 나는 다른 친구 못지않게 1등이 아니더라도 2등, 아니면 3등을 하고 싶은 승부욕이 너무 강해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부에 열정을 기울여서 내 꿈이었더 장학금까지 받고 이제 한국에 와 있다. 고등학교 친구들은 내가 여기까지 올 줄 누가 알았게느냐면서 부러움을 표현했다.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벗으며 꽃입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이 시를 보니까 나의 인생도 바람과 비를 맞으며 피어가는 꽃이 아닌가 싶다. 어린 시절은 나에게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이다. 그래도 그런 어려움 덕분에 내가 지금처럼 성숙해지고 강해진 것 같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늘 나의 죄우명이다. 너무 어렵고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은 성공한 사람에게 쓸모없는 것이다. 인생에서 실패해야 앞으로 그 실패를 다시 한 번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성공할 수 있다. 꿈이 필요하지만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시련에 부딛쳐도 극복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글쓴이: 원티쩜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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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상생활 속의 웨일스어

웨일스 사람 중에 웨일스어에 능통한 사람의 비율이 20% 밖에 안 넘쳐도 웨일스의 일상생활에서 웨일스어를 많이 들을 수 있습니다. 특히 웨일스의 동북지역에는 웨일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남부보다 두 배로 많아서 길거리와 커피숍, 박물관 등에서도 웨일스어를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남웨일스에서는 길거리에서 웨일스어로 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해도 다른 방법으로 웨일스어를 접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S4C라는 웨일스어 전용 방송국이 있고 하루 종일 다양한 웨일스어 프로그램과 연속극부터 축구 시합 등까지 웨일스어로 방송해요. S4C의 제일 유명하고 가장 오래 방송되어 온 프로그램은 포벌 으 쿰(Pobol y Cwm)이라는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가 1974년부터 거의 40년 동안 방송되고 있는데 옛날 배역진 중에 할리우드(Hollywood) 배우 요안 그리피스(Ioan Gruffudd)가 있고 이 배우가 포벌 으 쿰을 통해 연기활동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 웨일스어 오역

일상생활에서 웨일스어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마 도로표지일 겁니다. 웨일스에서 모든 도로표지가 웨일스어와 영어, 2개의 공용어로 되어 있어요. 웨일스어 도로표지의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번역하는 사람의 수요도 동반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은 가끔 재미있는 오역을 초래할 때가 있는데요. 이런 오역을 보여 주는 좋은 예를 들자면, 어떤 슈퍼마켓의 간판이 있어요. 이 슈퍼마켓은 "대형 화물차 출입 금지 - 주택지역"이라는 간판이 필요했는데 번역하기 위해 시의회의원에게 이메일로 번역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동 답장을 받아서 번역문인 줄 알아 가지고 간판에 "지금 외출 중입니다"라고 표시해 놓았습니다. 웨일스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것을 많이 지적했기 때문에 슈퍼마켓이 빨리 실수를 깨닫게 되고 고쳤답니다.



● 세인트 파간스: 웨일스의 옛 모습

남웨일스에서 웨일스어를 많이 듣고 싶으시면 세인트 파간스(St. Fagans)라는 곳을 강하게 추천합니다. 세인트 파간스는 야외 민속 박물관인데 웨일스어 자격 요건이 있어서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웨일스어에 능통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주택이 즐비한 거리를 산책하면서 사방 곳곳에서 직원들의 웨일스어가 들립니다. 그리고 옛날 웨일스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체험할 수 있어서 저도 어릴 때부터 이 곳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웨일스의 과거를 경험하고 싶으시면 세인트 파간스가 정말 좋은 곳입니다.


글쓴이: 베쓰 압글린 (영국의 웨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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